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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손으로 — 일기문학과 생활미술이 만난 자리에서 다꾸를 생각하다

📑 목차

    글은 마음의 언어이고, 손은 감정의 언어다.
    일기문학이 마음의 내면을 문장으로 번역했다면, 생활미술은 그 마음을 손끝으로 옮긴 예술이었다.

    프랑스의 오토픽시옹은 자기서사를 예술로 끌어올린 문학운동이었다.
    생활미술은 예술을 삶으로 되돌린 감각의 운동이었다.
    이 두 흐름은 지금의 개인에게 결핍된 ‘자기서사’를 회복할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는 그 해답을 다꾸라는 손의 언어에서 찾는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어 단어의 형태로 정리하는 일이다.
    그런데 다이어리를 꾸민다는 건, 같은 기록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의 표현이다.
    손끝이 감정의 결을 따라 움직이고, 색과 여백이 문장 대신 감정의 자리를 차지한다.
    문학이 마음을 ‘글자’로 세우는 예술이었다면, 다꾸는 마음을 ‘형태’로 세우는 예술이다.

    나는 요즘, 일기문학의 내면성과 생활미술의 감각성이 다꾸라는 행위 안에서 만나는 것을 자주 느낀다.
    삶을 기록한다는 동일한 욕망이, 어떤 이는 문장을 쓰고, 어떤 이는 종이를 꾸미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다꾸는 그 둘 사이의 언어다 —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을 손으로 옮기고,
    손으로 다 쓰지 못한 마음을 시선이 완성하는 기록의 형식.

     

    글에서 손으로 — 일기문학과 생활미술이 만난 자리에서 다꾸를 생각하다
    글에서 손으로 — 일기문학과 생활미술이 만난 자리에서 다꾸를 생각하다

    1. 오토픽시옹 — 자기서사의 귀환

    1970년대 프랑스 문단에서 등장한 오토픽시옹(autofiction)
    ‘자기 이야기’를 허구의 언어로 다시 쓰는 실험이었다.
    작가 세르주 두브로브스키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 경험을 문학적 구조로 재구성하며 **“사실보다 감정의 진실”**을 탐색했다.

    이 시기 프랑스 문학은 구조주의 이후의 공허 속에서
    다시 ‘나’를, 다시 ‘주체’를 찾고자 했다.
    아니 에르노와 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작가들이
    자신의 기억, 계급, 성별의 문제를 자기서사로 서술하면서
    개인 서사가 사회적 언어로 확장되었다.

    오토픽시옹의 성취는 ‘자기서사’의 복권이었다.
    문학이 다시 개인의 감정과 삶의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한 개인의 경험이 보편적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신념.
    이건 일기문학이 처음 탄생했을 때의 충동과 같았다 —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예술의 중심에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 자기서사의 부활은 단지 문학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대인이 자기 자신을 다시 인식하려는 사회적 반응이었다.
    산업화, 매체화, 익명화 속에서 ‘나’의 목소리가 희미해진 시대 —
    오토픽시옹은 그 침묵을 깨는 문학적 몸짓이었다.


    2. 생활미술 — 예술을 삶으로 되돌리다

    생활미술의 뿌리는 19세기 말 아츠앤크래프츠 운동에 있다.

    산업화로부터 멀어진 손의 감각을 되찾고, 예술을 생활로 돌려놓으려는 사상은

    이후 바우하우스의 “예술과 생활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이 흐름은 1970년대 전후 각국의 미술교육·공예·생활예술 운동 속에서

    다시 힘을 얻으며 대중적 기반을 넓혔다.

    따라서 생활미술은 1970년대에 개념이 새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근대에 형성된 ‘생활 속 예술’의 사상이 현대에 재확산된 결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예술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삶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려는 태도다.”

     

    생활미술은 작품보다 행위, 결과보다 과정,
    전문가의 예술보다 생활인의 표현을 존중했다.
    이는 예술의 민주화였고, 동시에 감각의 회복 운동이었다.

    이 흐름은 오토픽시옹과 평행하게 움직였다.
    전자는 ‘언어를 통한 자기표현’,
    후자는 ‘손의 행위를 통한 자기표현’이었다.
    하나는 문학에서 ‘자기’를 되찾았고,
    다른 하나는 예술에서 ‘감각’을 되찾았다.


    자기서사적 예술의 연대기: 1880-2020

    시기 문학 미술 사회 배경 영향
    1880–
    1900s
    ✍️ 일기문학의 형성기 — 개인의 내면과 감정을 기록하는 글쓰기 등장.유럽 낭만주의, 실존주의의 영향. 🎨 아츠앤크래프츠 운동 (Arts & Crafts) — 윌리엄 모리스, “생활 속의 예술” 제창. 산업화에 대한 반발. ‘기계화된 세계 속 감성의 회복’. 개인적 감정과 손의 미학이라는 공통의 문제의식 태동.
    1910–
    1940s
    ✍️ 사소설(私小說) — 일본 문단 중심의 자기서사적 소설 전통. ‘사생활의 예술화’. 🎨 바우하우스(Bauhaus) — 예술과 기술, 공예의 통합.‘예술과 생활의 일체’를 교육철학으로 확립. 근대성과 개인의 정체성 문제 부상. 예술=삶, 삶=표현의 인식 확대.
    1950–
    1960s
    ✍️ 전후 문학에서 ‘자아’의 위기. 실존주의, 자서전적 글쓰기 확산. 🎨 모더니즘 이후의 반응 — 개념미술, 행위예술 등 ‘예술의 경계 해체’. 세계대전 이후 ‘인간’과 ‘실존’에 대한 근본적 질문. 예술의 탈제도화 시작.
    1970–
    1980s
    ✍️ 오토픽시옹(Autofiction) 등장 — 세르주 두브로브스키, 아니 에르노, 뒤라스 등.“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자신을 쓴다.” 🎨 생활미술운동(Everyday Art Movement), 공예부흥운동, 한국 생활미술교육 확산.예술의 대중화·감각의 회복 강조. 68혁명 이후 개인의 목소리, 여성의 서사, 감각의 민주화. “주체의 회복”의 시대정신 — 문학과 예술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를 되찾음.
    1990–
    2000s
    ✍️ 오토픽시옹이 세계문학으로 확산. 디지털 시대의 자서전적 글쓰기, 블로그·에세이 문화 등장. 🎨 디자인·공예의 생활화, DIY·핸드메이드 문화 확산.‘창작의 일상화’. 글로벌화, 매체 확장, 일상 미학의 부상. 자기표현의 일상화 — ‘글쓰기’와 ‘만들기’의 경계 흐려짐.
    2010–
    2020s
    ✍️ 디지털 자기서사 — SNS·브이로그·일기형 에세이 등 ‘자기 기록’의 폭발. 🎨 다꾸(Dakku), 저널링, 플래너 꾸미기, 디지털 노트 등 감각적 자기표현 문화 확산. 초연결 사회 속 ‘진짜 나’를 회복하려는 욕망. 다꾸 = 감각의 자기서사 — 오토픽시옹의 감정 서사와 생활미술의 감각 행위가 교차한 현대적 형태.

     

    3. 다꾸 — 다시 자기서사를 쓰는 손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를 생산한다.
    SNS, 블로그, 채팅창, 심지어 짧은 메모까지 모두 자기서사의 조각들이다.
    하지만 그 서사는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거의 남지 않는다.
    기록은 실시간으로 쌓이지만, ‘나’라는 서사적 중심은 점점 희미해지는 시대다.

    이 결핍은 오토픽시옹이 등장하던 프랑스의 상황과 닮아 있다.
    그때 작가들은 언어 속에서 사라져가는 ‘나’를 다시 불러내려 했고,
    생활미술가들은 산업화로 무뎌진 감각을 다시 되찾으려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디지털의 속도 속에서
    자기서사를 다시 손의 속도로 되돌려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꾸를 그런 회귀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손이 직접 종이를 만지고, 스티커를 고르고, 색을 배치하는 일련의 과정은
    결국 ‘감각의 시간’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 페이지 위에서 우리는 생산의 논리에서 벗어나 ‘머무름의 언어’를 쓴다.
    한 장의 종이는 자기서사의 최소 단위가 되고,
    그 위에 쌓인 여백과 흔적이 나의 감정 지도를 그린다.

    다꾸는 단순한 취미나 장식이 아니다.
    그건 자기서사적 결핍을 감각의 층위에서 복원하는 행위다.
    오토픽시옹이 “나를 다시 말하기”였다면,
    다꾸는 “나를 다시 느끼기”다.
    글로 자신을 정리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손으로 자신을 다시 조립하는 시대로 옮겨왔다.

    결국 다꾸의 의미는 단순히 예쁘게 꾸민 페이지가 아니다.
    그건 속도의 시대에 맞서는 사유의 행위이고,
    감각이 다시 사고를 이끄는 방식이다.
    손으로 쓰고, 붙이고, 비워두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자기서사의 온도를 되찾는다.

     


    오토픽시옹이 언어로 주체를 복원했다면,
    다꾸는 감각으로 주체를 회복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 손의 속도로 다시 나를 써보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꾸를 하는 이유다.